크레용을 건네면 "난 못 그려" 하고 고개를 돌리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그림 시간마다 빈 종이로 돌아오기도 하지요. 그림을 싫어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아이가 그림을 좋아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다만 '싫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피하고 있다면 조금 도와줄 수 있습니다. 먼저 이유를 살펴보고, 이유에 맞는 방법을 골라 보세요.
먼저 이유를 관찰해 보세요
"왜 안 그려?" 하고 직접 물으면 아이는 대개 "그냥", "재미없어"라고 답합니다. 이유를 말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신 며칠 동안 아래 질문을 떠올리며 지켜봐 주세요.
- 시작은 하는데 금방 지우거나 구기나요? → 완벽주의 쪽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못 그려"라는 말을 자주 하나요? → 이전에 부정적인 경험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 빈 종이 앞에서 한참 멍하니 있나요? → 무엇을 그릴지 정하는 것이 부담일 수 있습니다.
- 조금 그리다 손을 털거나 연필을 자주 바꿔 쥐나요? → 손이 쉽게 지치는 것일 수 있습니다.
- 친구나 형제 옆에서만 유독 안 그리나요? → 비교가 신경 쓰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유가 하나만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이유부터 하나씩 다뤄 보세요.
이유별로 다르게 다가가기
완벽주의: "똑같이 안 그려져"
머릿속 그림과 손이 따라가지 못하는 차이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아이입니다. 대개 5~7세에 두드러집니다.
- 지우개를 잠시 치워 보세요. 대신 "틀린 선은 없어. 다른 게 될 뿐이야"라는 규칙을 정합니다.
- '일부러 엉망으로 그리기' 놀이를 해 보세요. 왼손으로 그리기, 눈 감고 그리기, 10초 만에 그리기처럼 잘 그릴 수 없는 조건을 만들면 '잘'이라는 기준이 사라집니다. 어른도 함께 하면 웃음이 터지고 긴장이 풀립니다.
- 과정을 이야기해 주세요. "멋진 그림도 처음엔 다 삐뚤삐뚤한 선부터 시작해."
"못 그려" 경험: 평가받은 기억
누군가 "이게 뭐야?" 하고 웃었거나, 그림을 고쳐 받은 경험이 있으면 아이는 그림을 '평가받는 일'로 기억합니다.
- 한동안 그림에 대한 평가를 멈추세요. 칭찬도 줄이고 "어떤 색 썼네" 정도로 본 것만 말해 줍니다.
- 결과물이 남지 않는 그리기부터 시작하세요. 욕실 벽에 물로 그리기, 모래나 쌀 위에 손가락으로 그리기, 창문 김 서린 곳에 그리기처럼 금방 사라지는 그림은 부담이 없습니다.
- 아이가 선생님이 되게 해 보세요. "엄마는 공룡 못 그리는데, 어떻게 그려?" 하고 배우는 쪽이 되면 아이는 평가받는 사람에서 가르치는 사람으로 자리가 바뀝니다.
흰 종이 부담: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 제약 없는 빈 종이는 어른에게도 막막합니다.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출발점이 없는 것입니다.
- 종이에 무언가를 먼저 그려 주세요. 선 하나, 점 세 개, 동그라미 하나만 있어도 아이는 "이걸 뭘로 만들까?"부터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그라미는 무엇이 될까?」나 「지그재그는 무엇이 될까?」처럼 모양 하나에서 시작하는 그림이 이런 아이에게 잘 맞습니다.
- 질문으로 시작하세요. "무엇을 그릴래?"보다 "비가 오면 누가 제일 좋아할까?"처럼 구체적인 질문이 그림의 문을 열어 줍니다.
- 작은 종이를 쓰세요. A4 대신 포스트잇이나 엽서 크기의 종이는 채워야 할 공간이 적어서 시작하기 쉽습니다.
소근육 피로: "손 아파"
연필을 오래 쥐는 것이 아직 힘든 아이도 있습니다. 특히 4~5세는 손가락 힘과 조절이 계속 발달하는 중입니다.
- 도구를 바꿔 보세요. 가는 연필보다 굵은 크레용, 짧게 부러뜨린 크레용, 물감 붓, 스탬프, 손가락 물감이 손에 덜 부담됩니다.
- 세워 놓고 그리게 해 보세요. 벽에 붙인 종이나 이젤에 그리면 손목과 어깨를 함께 써서 덜 지칩니다.
- 짧게 끝내세요. 5분 그리기, 그림 하나에 선 다섯 개만 같은 작은 목표가 좋습니다.
- 손 놀이를 따로 하세요. 클레이 주무르기, 집게로 콩 옮기기, 스티커 떼기 같은 놀이가 그리는 손을 기릅니다.
연필을 쥐는 것 자체를 매우 힘들어하거나, 그림뿐 아니라 단추 채우기, 숟가락 쓰기 등 손을 쓰는 일상 활동 전반이 또래보다 많이 어렵다면 그림 문제로만 보지 말고 소아과나 작업치료 등 전문가와 상담해 보세요.
비교: "형은 잘 그리는데"
- 같은 공간에서 다른 활동을 하게 하세요. 형제가 그림을 그릴 때 아이에게는 콜라주나 스탬프를 주어 비교 대상을 없앱니다.
- 협동 그림을 해 보세요. 한 장에 형이 하늘을, 동생이 땅을 그리면 경쟁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일이 됩니다.
- 아이만의 주제를 찾아 주세요. 공룡이든 버스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그릴 때는 비교보다 즐거움이 앞섭니다.
다시 연필을 잡게 하는 단계
이유와 상관없이, 아래 순서로 천천히 부담을 낮춰 가면 많은 아이가 다시 그리기 시작합니다. 한 단계에 일주일이 걸려도 괜찮습니다.
- 어른이 혼자 즐겁게 그립니다. 아이에게 권하지 않고 옆에서 그냥 그립니다. 일부러 엉뚱한 그림을 그리고 "아, 코끼리 코가 너무 길어졌다" 하고 웃어 보세요.
- 아이에게 아주 작은 역할을 줍니다. "여기 눈 하나만 그려 줄래?", "이 꽃은 무슨 색이 좋을까? 칠해 줄래?"
- 완성된 부분에 한 가지를 더하게 합니다. 이미 그려진 그림에 무늬, 표정, 날씨를 더하는 정도입니다. 「비를 내려 주자」처럼 선만 그어도 완성되는 그림이 좋습니다.
- 질문 하나로 그림 하나를 그립니다. "피자에 무엇을 올릴까?"처럼 고르기 쉬운 질문을 줍니다.
- 아이가 고르게 합니다. 그림 주제 몇 가지를 보여 주고 아이가 고르게 하면 '시킨 일'이 '내가 고른 일'이 됩니다. MyKidsDraw처럼 여러 미완성 그림 중에서 고르는 방식도 이 단계에 쓸 수 있습니다.
하지 않는 것이 좋은 말과 행동
- "한 장만 그리면 간식 줄게." 보상은 그림을 '해치워야 할 일'로 만듭니다.
- "너 그림 그리기 싫어하잖아." 아이에게 이름표를 붙이면 아이는 그 이름표대로 행동하기 쉽습니다.
- 다른 사람 앞에서 그림을 보여 주라고 강요하기.
- 아이가 그만하고 싶다는데 "조금만 더" 하고 붙잡기. 다음 시작이 더 어려워집니다.
나이별로 기억할 점
- 4세: 그림을 싫어하기보다 앉아 있기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닥, 벽, 야외 등 그리는 장소를 바꿔 보세요.
- 5세: '잘 그리는 아이'를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평가 없는 그리기 시간을 꾸준히 만들어 주세요.
- 6~7세: 그림 대신 만들기, 만화, 지도 그리기처럼 '쓸모 있는 그림'에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보물 지도, 생일 카드처럼 목적이 있는 그림을 권해 보세요.
오늘 바로 해 볼 것
- 사흘 동안 아이가 그림을 피하는 순간을 관찰하고, 위의 다섯 가지 이유 중 무엇에 가까운지 적어 보세요.
- 오늘 저녁에는 아이에게 권하지 말고 어른이 먼저 옆에서 엉뚱한 그림을 그려 보세요.
- 종이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두고 아이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세요.
- 굵은 크레용이나 물감 붓처럼 손에 덜 부담되는 도구를 하나 준비하세요.